나 부터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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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고치겠습니다.
지난 토요일(22일) 오전에 우리 교회가 속한 용천노회로부터 “나부터 고치겠습니다.”라는 캠페인 스티커를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그 스티커를 보며 “교인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부착해 놓아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눈에 잘 띄는 장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또 다른 사람들을 고칠 생각부터 하는구나!” 라는 책망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스티커를 먼저 목사인 내 마음속에 붙이고 나부터 무엇을 고쳐야할까를 고민해 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분노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소리는 별로 들어보지 못합니다. 상처를 받는 사람은 무수히도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요? 간단합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내가 준 상처는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한다고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자위하는 습관이 있는 반면에 상대에게 받은 상처는 마음 깊은 곳에 새겨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과를 받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준 상처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향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준 상처는 돌에 새기고 받은 상처는 물에 새기는 것이 성경적 삶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간에 깊은 상처로 점철된 불행한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잘 처리하는 지혜와 성숙함도 있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외형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해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해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여도 자신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화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무가치한 것이지요. 내 마음의 상처가 완치되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이전처럼 동일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게 잘 안되고 어색하거나 또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건 상대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의 상처를 갈무리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역행하는 삶입니다. 사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너무 어려운 과제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목회자와 성도 간에, 혹은 성도 상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처들과 아픔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고 해결하고 극복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이 내 마음의 상처를 완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용서와 치유와 회복이 있는 하사랑 가족공동체 교회이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주여, 나부터 00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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