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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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신가?
지난 금요 기도회 시간에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 어느 분이 “예수님은 나의 신랑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한 사람이 제 아내이기에 저는 이 고백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예수 나의 신랑!”-아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 환상에서 신앙인을 가리키는 어린양의 신부 곧 예수님의 신부라는 명칭이 생겨났습니다. 신부의 자리는 일하는 곳, 노동의 현장이 아닙니다. 신부는 신랑과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 있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며 그와 함께 모든 삶의 애환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부의 자리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바라는 것은 사랑의 고백이나 찬양의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전 노정을 묵묵히 함께 걷는 동행의 인격입니다. 물론 신부는 신랑을 위해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어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날마다의 삶의 발걸음을 신랑과 동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독일 뤼벡 교회의 낡은 벽에 붙어 있는 돌판에는 ‘주(主)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저는 이 시에 ‘너희는 나를 신랑이라 부르면서 나에게 무관심하고’를 추가해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가 신랑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신랑의 속 깊은 아픔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매일 아침 신앙고백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머리에 ‘키파’라 불리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유대인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모자를 음식을 먹을 때도, 걸어갈 때도, 잠을 잘 때도 씁니다. 불편할 수도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할까요? “내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보고 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신랑이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잊지 않고 그분과 동행하는 행복한 신부의 일상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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